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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롭게

영화 [비밀의 언덕], 언덕은 둥그랗다 (GV 및 스포 후기)

by 얕카이버 2024. 6. 11.

영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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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koreafilm.or.kr

2024.03.09. 오후. 이지은 감독, 손희정 평론가와 함께한 GV

 

 

이동진 평론가님의 [Beau Is Afraid](2023) 언택트톡을 보면서 영화 직후 언택트톡을 자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언택트톡 내용 자체는 훌륭했지만 그전에 스스로 영화를 온전히 곱씹어보는 시간을 가져보고 싶어서.

그래도 GV에 대해선 막연한 환상을 갖고 있었는데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너무 보고 싶어서 아껴뒀던 비밀의 언덕 GV, 이지은 감독님 영접.

 

영화 상영 이후,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지고 GV 시작.

손희정 평론가님의 기본적인 질의 이후 관객 질의응답으로 이루어졌다.

아래는 GV에서 오간 내용 일부 정리.

 

 

 

1. 작품의 탄생 배경, 감독님의 의도 관련

-10대 여성 캐릭터의 주된 욕망을 표현하려 했다.

이 10대 여성 캐릭터의 주된 욕망이라고 하면 어느 정도 공감대가 있는 몇 가지를 떠올릴 수 있는데,
초청받은 영화제(72회 베를린 영화제 제너레이션 K플러스 부문)에서는 생각한 것보다 다양한 욕망을 표현한 작품이 많아서 즐거웠음.

 

-어렸을 적 누구나 고민해 봤을 만한 소재(가정환경, 직업 귀천 등)

이를 숨기게 되는 사건을 '가정환경조사서'라는 아이템으로 시작

 

-학급 회장 어머님은 우울증 책을 읽는 묘사를 하고 더 나아가진 않음. 의도가 어느 정도 가늠이 되지만 감독님의 의도는?
->다양한 가정을 보여주기(어디에나 빈틈이 있음). 얼마나 공허했으면 아들 숙제 도와주며 채울까
(인간적인 빈틈을 보여주는 면은 다른 인물에서도 나타남)

 

2. 촬영 비하인드

-작품을 다시 볼 때마다 이명은(이하 명은) 역의 문승아 배우를 재발견하는 것 같다.

감정 연기가 저렇게 디테일했구나 하고 새삼 느낄 정도.

 

-주연 오디션에 '명은이를 찾고야 말겠다'는 마음으로 임했는데, 문승아 배우 차례가 끝난 후 느낌이 왔다고 한다.

같이 있던 분과 무언의 공감을 주고받았다고.

 

-하혜승 배우(회장 엄마 역)의 촬영 외적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문승아 배우와 사담을 나눌 때도 "아줌마가~"라는 표현을 썼다고 한다. 하혜승 배우 나이에 스스로를 아줌마라 칭하는 게 보통 일은 아닌데도.

 

-회장 역의 남학생은 사실 명은을 좋아하는 것 같다는 관객의 촌철도 있었다 ㅎㅎ

 

-명은 캐릭터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고, 이를 훌륭하게 연기한 문승아 배우에 대해서 무척 높게 평가하시는 것 같았다.

 

-많은 관객들이 영화 자체와 명은이라는 캐릭터에게서 스스로를 보고, 위로를 받은 것으로 보였다.

이에 명은의 앞으로에 대한 이야기도 많았는데(앞으로 글을 썼을지, 언덕에 묻은 글을 다시 꺼내보았을지)

감독님은 관객의 생각을 존중해 주면서 문승아 배우가 일전 GV에서 한 답변을 많이 인용하였다.

역시 명은이는 당사자가 제일 잘 안다는 것처럼.


1. 꾹꾹 눌러 담은 편지

선물부터 포장지, 포장지에 다는 장식까지 한참을 고민하는 여자 아이.

학기 초 담임 선생님과의 개별 상담을 앞두고 명은이는 선물을 준비한다.

헤어스타일도 바꾸고(감독님 언급), 선물과 편지까지 준비하는 것을 보니 명은이는 이번 5학년 생활에 큰 다짐을 했나 보다.

처음엔 명은이가 어떠한 이유로 담임 선생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건가 싶었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지는 않아 보였다.

명은의 새 학년 다짐이 가장 컸으리라.

 

 

편지를 쓰다가 틀리면 새로운 편지지에 쓴다. 지우개로 지우면 지저분해져서 싫은가 보다.

선물과 편지 준비를 끝내고 나서도 장식의 색깔이 마음에 안 드는지 다시 문방구로 가서 기어코 바꾼다.

"선생님은 역시 핑크가 더 어울릴 것 같아서요."

명은의 잘 보이고 싶은 마음, 조금은 완벽주의자 같은 면모가 무척 드러나는 시작이다.

 

그런 친구들이 있었다.

편지나 시 쓰기 과제가 있을 때 연필로 쓴 글씨에 예쁜 펜으로 글씨를 덧쓴다.

덧쓰고 나면 연필로 쓴 글씨는 지운다. 펜으로 쓴 글씨만 깔끔하게 남는다.

'저걸 어떻게 하지' 하면서도 따라 해 본 적이 있다.

 


2. 영화 속 '쓰기'

편지 쓰기로 시작한 영화는 가정환경조사서 쓰기로 이어진다.

담임 선생님은 조사서만 수합하고 끝내기보단 아이들과 한 번씩 상담을 진행한다. 무척 다정한 선생님이다.

명은이는 가정환경조사서 내용을 밝히기에 부담을 느꼈는지 상담을 피하려고 하지만 담임 선생님의 기지(?)로 먼저 상담을 하게 된다. 이 상담으로부터 명은의 '비밀'이 시작된다.

 

지금도 학기 초에 가정환경조사서를 쓰는 경우가 많다.

예전과 양식도 바뀌어서 비상연락망 수집과 특이사항 파악이 주된 목적이긴 하다.

설마 이전에도 그랬겠냐마는, 종이 한 장으로 소중한 인격체를 판단하려는 오만한 생각은 다행스럽게도 없어진 지 오래다.

 

그럼에도 이 종이 한 장이 어떤 아이들에겐 부담이 될 수 있겠다.

어른들 입장에서는 충분히 이해하고 조금은 모른 척해줄 수 있는 부분이 아이들의 입장에선 얘기하는 것 자체가 부담이 될 수 있다니.

애초에 이해와 모른 척이 필요하다는 것 자체가 아주 가벼운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겠다.

 

감수성이 자라나기 시작하는 아이들은 가족관계, 부모님 직업란을 쓰면서 어느새 '다른 친구들은 뭐라고 쓰지?'라 생각한다.

 


3. 참으로 무해한 인물들

한 관객의 평 중에 빌런이 없어서 좋았다는 말이 있었다.

 

영화가 아니라 현실이더라도 악의를 가지거나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인물이 종종 있다.

그런 인물은 갈등의 중심이 되며, 영화에서는 이야기를 이끌어가기도 한다.

 

명은이의 주변 세계를 보자면 아이들의 인권을 무시하는 괴팍한 선생님이 나올 수도 있고, 명은이와 크게 갈등을 빚는 학생을 등장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 [비밀의 언덕]에는 그러한 인물이 없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이 아니라 모두 따뜻하고 다정하다.

 

지각한 담임 선생님을 망신 주지 않으려는 교장 선생님,

학급 아이들의 의견에 귀 기울여주는 담임 선생님과 그걸 또 수용해 주는 교장 선생님,

주말에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회사를 서성이는 아이를 위해 바쁜 시간을 내어주는 회사원,

명은이의 감수성을 무척 존중해 주는 삼촌과 할아버지.

 

물론 이러한 인물들이 완벽한 존재로 그려지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훌륭한 선생님으로 보이는 김애란 선생님도 지각이 잦은 면이 있고,

교장 선생님도 동료이자 후배, 학생들을 감싸주려는 마음이 있지만 그 방법으로 거짓말을 택한다.

사회적으로, 종교인으로서 고결해 보이는 할아버지도 아버지로서 부족한 면이 있고,

가족 내에서 나름대로 노력하는 삼촌도 사회, 경제적으로는 아쉬운 면이 있다.

 

어떻게 다 좋은 사람 밖에 없지?라는 의문은 수긍으로 변한다.

세상에는 남을 해하려 하는 존재보다 그저 그렇게, 무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불의에 맞서 싸우고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보여주는 것도 좋지만, 이 영화는 평범하고도 현실적인, 그래서 사랑스러운 인물들을 그린다.

 


4. 비밀과 솔직함

'완벽하지 않은' 인물들의 모습.

김애란 선생님의 지각, 교장 선생님이 전학생에게 한 당부, 할아버지와 삼촌의 맨 얼굴 등은 일종의 '비밀'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비밀스러운' 부분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을 명은은 관찰하게 된다.

 

특히 영화에서 '비밀''솔직함'에 대해 보여주는 태도가 인상적인데.

 

혜진과 하얀은 주인공 명은과는 달리 '솔직함'을 무기로 세상과 맞서는 아이들이다.

명은은 이 친구들을 만나서 영향을 받고 성장하게 되는데, 그렇다고 이 '솔직함'만을 고귀한 것으로 그리진 않는다.

 

솔직하고 성숙한 듯 보이던 혜진과 하얀은 시 대회에서 솔직한 글을 쓴 명은에게 순위가 밀리자 상심하여 명은을 멀리한다.

상에는 관심이 없고 솔직하게 글을 쓰는 게 좋다고 했던 말 뒤편에 그 아이들의 '비밀'이 있었던 것이다.

이 주제는 이후 명은과 선생님의 필담에서도 조명된다.

 

솔직한 글로 대회에서 큰 상을 받게 된 명은은 그 글이 신문에 실리면 가족이 상처를 받게 될까 봐 수상을 거부한다.

이전까지는 상을 받으라고 설득하던 선생님도 명은의 진심을 알게 되자,

솔직함도 좋지만 거짓말을 하더라도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며 명은의 선택을 존중한다.

 

교장 선생님의 하얀 거짓말에 배려받던 김애란 선생님이 말함으로써 더욱 의미가 깊어지는 장면이었다.

 

영화 속 비밀은 드러나기도 하지만 비밀로 남겨지기도 한다.

명은의 행동을 가족들이 모르기도 하며, 가족들 모두 명은의 의도를 알지만 그걸 모른 척해주기도 한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투명해지는 과정을 그리지 않으며, 실제로 그러한 과정이 필요해 보이지도 않는다.

비밀과 진실.

보다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는 것을 어느새 느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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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학년이 된 명은. 웃으며 가정환경조사서를 뒷장으로 넘긴다.

그 모습이 뒷장보다는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명은이 삶의 다음 장에는 이런 장면이 있을 것 같다.

 

-"야 내가 초등학교 때 글쓰기로 시 대회 나가서 1등이랑 3등 상 다 탔다니까?

-"뭐라는 거야. 이명은 얘 취했네. 야 짠해, 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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